사진. 김태화
사진. 김태화
사진. 김태화
기억의 여행
2021, 노블레스 컬렉션
‘기억’과 ‘치유’를 주제로 작업을 이어온 이성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억의 여행’이라는 테마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감정을 꺼내어 정화해가는 스스로의 여정을 보여준다.
전시는 파란 하늘을 나는 종이비행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접어 두었던 기억을 다시 펼쳐내는 의미를 담은 Unfolding 연작은 종이 대신 함석판을 접어 오리가미 비행기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흰색의 레진을 여러 겹 덧입혀 완성되었다. 작품은 하늘이 보이는 윈도우 갤러리 벽면을 지나서 날아드는 듯이 설치되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전시장 안으로 전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Unfolding 작품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오늘의 조각’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반 구체 형태의 플랙시 글라스의 단면을 염색하고 여러 겹 포개어 쌓아 올린 부조 작품으로 전시장 메인 벽을 채웠다. 조각이지만 방향에 따라 마치 드로잉처럼 보이는 이 작품에는 플랙시 글라스의 포개어진 각도와 그림자에 따라 다양한 동심원이 나타난다. 작가는 매일의 감정을 기록하듯 작품을 완성했는데, 닮은 듯 서로 다른 작품의 표정들은 반복적인 일상에서도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작품에는 주소 또는 핸드폰 번호에서 따온 숫자로 이루어진 고유코드(좌표)가 부여되어 있다. 감정을 수치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감정이 일어난 장소는 지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기억은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의 조각’은 마치 기억 속의 시간과 장소를 찾아가는 작가의 여행일기를 읽는 듯하다.
‘오늘의 조각’ 앞에는 작가의 시그니쳐 작업인 유리파편을 사용한 Fading Memory 작업이 설치되어 있다. 작가는 볼티모어 유학시절 밤거리 폭력의 현장에서 산산조각이 난 유리파편에서 얼핏 단단해 보이지만 작은 충격에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폐허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루트를 찾아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Process Art’로 불리는 이 작업은 유리 파편들을 수집하여 세척, 정돈한 후에 다시 새로운 형태로 이어 붙이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배송 중에 파손되어 반품된 가구의 유리파편이 새롭게 사용되었다. 온라인 주문 후 반품되어 오프라인 목적지에 안착하지 못하고 폐기되는 제품은 마치 현실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사물처럼 느껴진다. 사고는 찰나이지만 그 순간의 충격은 그대로 부서진 파편에 흔적으로 남게 되는데, 그 파편들은 각각의 사연을 담은 채로 그 자체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시는 ‘기억의 풍경화’ 시리즈로 마무리된다. 플렉시 글라스에 향의 그을음을 입힌 이 작업은 향을 태우는 정화 행위의 순간이 봉인된 듯한 느낌을 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 향이라는 것은 마음을 정화하기도 하지만 그 향기를 처음 맡았던 장소를 떠오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기억이 날아가버릴까 순간의 감정을 폴라로이드 필름에 남기려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작가는 반투명한 플렉시 글라스 표면에 기억의 잔상을 담아냈다.
글로벌 펜데믹은 개개인을 반 강제적으로 공동체와 단절시키고, 자신의 삶에 더욱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작가의 일상도 바꿔 놓았으며, 바뀐 일상은 자연스럽게 이전과는 다른 형식과 스케일의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그녀의 신작들은 담백해 보이지만 더욱 깊은 감정의 레이어가 쌓여 있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도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