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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둔 마음: 이성미와의 인터뷰

맹지영 | 독립 큐레이터

상처가 나고 덧날까봐 마치 보호본능처럼 칭칭 싸매고 마음 깊숙이 넣어 두었던, 더 이상 매끈하지만은 않은 마음을 들여다보려 한다. 삶에서 긁히고 찢기는 상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을 견디고 대면하며 보내는 시간들은

어느덧 보이지 않는 가느다랗고 투명한 실이 되어 벌어진 상처의 간격을 조금씩 메워 간다. 차곡차곡 쌓아두고 묻어둔 마음은 어느새 큰 덩어리의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이 되어 마음을 울린다. 매번의 만남이 새로운 항해가 된다.


작가 이성미를 처음 만났던 것은 2007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재까지 그의 작업을 만나오면서 담아 두고 꺼내지 못했던

질문들이 몇 가지 있었다. 어쩌면 그 질문들은 이미 답이 짐작되었거나 질문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거나, 이미 과정 중에 답이 되었거나, 혹은 훗날로 유예시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돌아보면 나와 작가가 작품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모두 각자의 내부로 향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던지는 질문 중에도 이미 질문에 내가 내린 나름의 답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작가를

통해 듣고 싶은 몇 가지를 추려 물어 보았다.

 

그간의 작업은 재료가 드러나는 것을 강박적으로 제어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재료에 대한 이해와 탐구가 깊은데 수행하듯

집요하게 연마하여 표면을 매끄럽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이었나?


재료에 대해서는 마치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한 태도를 가져왔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재료도 최대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품의 시작부터 완성까지의 과정과 더불어 그 이후의 재료

변화까지 시간을 할애해서 지켜보았다. 그것이 짧게는 1년이 되기도 하고 길게는 10년 이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재료를 관찰하면서 실험하고 탐구했다. 내가 사용하는 재료가 특정 온도나 습도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구현되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자세히 그 성질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최대한 이해하고 자유롭게 재료를 조정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을 습득하려는 과정에서 작업의 표면이나 질감을 통해 나의 집요함이나 강박이 드러났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나는 작업에서 기술적으로 도달하고 싶었던 경지가 있었다. 누구도 그 정도로 매끈하게 연마하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마치 공산품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상태까지 구현해보고 싶었다. 일단 그 지점까지 가보고, 그런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춘 작가가 되겠다는 일종의 혼자만의 작가로서 목표와 그에 수반된

수행이었던 것 같다. 완성도에 대한 목표와 집착, 갈망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기술적으로 장인의 경지까지 가는 것이 목표이자

기준점이었다.

 

재료의 연약한 상태를 견고하게 만들어 오면서 표면이 매끄럽고 부드럽게 연마되어 때로는 재료의 물성을 착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치 고통이나 슬픔을 여러 겹으로 봉합하고 집요하게 갈아내며 되도록 흔적을 만들지 않고 없애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관객은 그동안 당신의 작업에서 ‘견고함’만을 대면해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질문에서 언급한대로 주변에서 나의 집요한 과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어떠냐는 애정 어린 조언도 있었고, 때로는

손으로 한 것이 맞는지, 도자기나 공산품이 아닌지, 갈아낸 것이 아니라 녹인 것은 아닌지 등의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생각한 기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과정을 거쳐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재료에 대해 이해하고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적인 부분이 충족 되고 자신감이 생겼을 때, 점차 매끄러운 표면과 같이 질감에 대한 집착이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과거의 부조나 입체 작업은 원, 사각형 등 단순한 형태가 많아서, 매끄러운 질감이 작업 안에서

굴곡이 만드는 공간감과 형태의 입체감이 더 강조되면서 견고하게 보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예측하지 못하는 삶의 변수들, 이를테면 갑작스러운 사고나 죽음 등에 의해 울퉁불퉁해지는 개인의 일상이나 삶 속에서, 나의 삶이 매끄러워지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이 작품에 스며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작업이 Zen 사상과 명상적이며 치유의 내용을

품고 있어서 마치 작업의 과정이 일종의 개인적인 수행과 기도의 형태로서, 매일매일 연마하면서 깨끗하고 매끄러운 표면의 질감으로 표현된 것 같다. 나 스스로가 이 고된 과정을 통해 삶이 개선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재료가 가진 가장 ‘연약한’ 상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동안 견고함으로 가는 긴 여정 안에서 존재하는 연약함을 왜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재료가 가진 ‘연약함’ 의 상태는 나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깨진 유리로 설명 할 수 있다. 깨진 유리는 쓸모가 없다. 본연의

재료로서의 가치도 없고 기능도 상실한 위험한 쓰레기로 여겨진다.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아무도 원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무도 원치 않는, 보잘것없는 이 재료에 애잔함을 느낀다. 


나는 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기존에 주어졌던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서 보석보다도 더 빛나고 귀하게 만들고 싶었다.

작업의 과정을 통해 새롭고 소중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큰 충격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버린 유리 조각들을 하나씩 다시 이어 붙이는 행위는 일종의 치료의 과정이었다. 누군가를 치료해주면서, 내 스스로도 치료가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보잘것없고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사물을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하면서, 상처받고 나약한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치유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작고 볼품없는 조각들이 모여 하나로 뭉쳐져 집합이 되었을 때의 힘을 믿는다. 유리 파편의 작은 조각들을 모아서 만든

작품을 통해 그 힘과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며 꽤 단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마음도 약하고 쉽게 상처 받기도 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그런 내 모습이 깨진 유리 조각이라는 재료에 투영되었고, 그것을 연마하며 매끄럽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나의 ‘연약함’이 점차 단단하고 견고해져 가길 간절하게 바랐기에 작업에서 드러나지 못했던

것 같다. 

 

매일의 수행처럼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드로잉들이 존재하지만, 완결된 작업을 보는 관객에게는 작가의 긴 사유와 수행의

시간을 알아차리기에는 속도의 격차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평면과 입체 작업들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전작들과

달리 작업의 과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데, 매체를 다루는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작업 과정이 워낙 시간이 오래 걸리는 노동 집약적(labor intensive)이어서, 작업에 담긴 주제와 내용들이 작품을 시작한 시점에는

유효했으나 마무리가 될 무렵의 시대적 상황과 차이가 나는 경험도 했다. 혹은 이미 작업의 과정이 꽤 진행되었을 때나 완성했을

무렵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작가의 작품이 우연히도 먼저 전시가 되기도 해서,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작품들도 있다. 이

부분은 꽤 오랜 시간 작가로서 많이 고민했다. 


과거의 작품들은 특히 더 작품의 과정이 작품의 결과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오랜 제작과정 (creating process)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종종 당시의 분위기와 속도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예를 들어, 작품을 통해 제기한 문제나 질문들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는 이미 해결책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 


이번 전시 《Blue Hour》 는 과거 내가 자주 사용했던 재료들을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의 주재료 중 하나로 여겨지던 유리 조각들을 사용하지 않았고, 기법적으로는 매끈한 유리처럼 연마된 코팅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이미 너무 친해져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재료들이 아닌 새로운 친구들을 알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을 걸쳐서 알게 된 익숙한 재료들들 과감히 던지고, 작업의 과정에서 생기는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다른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스펙트럼을 넓힌 기간이었다. 이번에는

조각, 드로잉, 페인팅의 경계를 나누지 않았고 입체의 형태에 자유롭게 페인팅으로 뿌리고, 레이어를 만들기도 하고, 그 위에 또

드로잉을 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회화적 배경을 조각에 녹이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페인팅, 조각, 설치 나누어서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좀 더 작업을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자유롭게 하였다. 전시 서문에서 박지형 큐레이터가 언급했듯이 ‘회화적 기법 과 조각적 태도’를 볼 수 있는 전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작가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동시에 깨끗하고 매끄러운 표면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벗어난 시점이기도 하다. 내 스스로도,

내 자신에게 좀 더 편해진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하고, 좀 더 폭 넓은 태도가 어쩌면 작가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좀 더 삶에 대한 포용력이 넓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내가 지난 5년 동안 해온 작업 과정을 돌아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특별했는데, 과거의 드로잉 작업이 지금의 설치

작업에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구름 Cloud Nine> (2024)는 2021년도에 참여했던 DMZ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 <Invisible and Visible>(2021)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DMZ의 철망을 단순화해서 만들었던 유닛(unit) 들을 투명한 철망으로 보여줬던 작품이었다. 


<구름 Cloud Nine> (2024)는 갤러리SP 공간에 맞춰 만들어진 장소 특정적 설치로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는 구름으로

형상화 되었다. 이 작업은 공간에 맞춰 DMZ 전시의 <Invisible and Visible>(2021)과는 다른 여러 종류의 푸른색들로 다시 염색되고,

샌딩되서, 투명함과 반투명함이 섞인 색채로 계획하여 수채화처럼 표현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드로잉을 정리하던 중, 2019년 파리 cite 레지던시에서 했던 드로잉 <The Meditation in Paris>와 2024년의 <구름 Cloud Nine>의 형태가 일치됨을 우연히 발견 하였다.

어쩌면 내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매우 놀라웠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도 두 작품이 포함되는데, 관객이 그런 연결지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질문에서 얘기한대로, 항상 작업의 과정은 결과만큼 중요한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난 그 동안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거의 작업들은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된 결과물의 존재에만 더 집중하여 보여 준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어쩌면,

내 개인적인 일상을 전반적으로 공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매일 지켜온 작업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로잉을 포함한 설치와

조각 작업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스스로에게 더 편해진 것 같다.

 

이번 전시의 입체 작업들도 과거 작업들과 달라진 부분이, 내부에 보이지 않던 과정들이 표면에 고스란히 남지만 여전히 연마의 결과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고통과 슬픔이 깊을 때는 언급조차 할 수 없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작업에서 보이는 변화가 과거의 슬픔과 고통, 상처들이 조금은 치유가 되었거나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맞는 말씀이다.  한국에 와서 지난 10여 년간의 아침의 수행이, 또 작업의 과정을 통한 명상의 과정과 자아성찰이 제대로 작동한 것인 것 같다. 시간이 약일 수도 있다. 어느 정도 굳은살이 생겼고, 스스로 자가 치유가 된 부분이 크다. 작품의 과정을 통해, 또 중견작가가

되면서, 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커진 것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세상이 두렵고, 불안하고, 예측 할 수 없고, 정작 내일 일도 알 수는 없지만, 그 예측할 수 없는 범위를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부분을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작업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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