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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파편이 빚은 완성체

기억이 형상의 옷을 입었을 때, 그 힘은 더 커진다. 이성미 작가의 작품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송 | 노블레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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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오늘의 조각’ 설치 전경. 사진 홍철기
아래쪽 오늘의 조각 1010, Mixed media, 30×30×9.5cm, 2021

사람의 기억은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리고 그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우리를 빨려들게 한다. 이성미의 작품이 꼭 그렇다. 개인의 기억과 감정에서 출발한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투영됐다. 그렇다고 ‘아, 그녀의 기억은 이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우리 역시 자신만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멀리서 보면 깨끗하고 영롱한 조각 작품으로 읽힌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자잘하게 깨진 무수한 유리 조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유리는 작가가 직접 겪은 사건과 연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동차 사고다. 작가가 유리 조각을

모으는 데 바탕이 된 사건이다.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 꾸준히 자동차 사고로 파편화된 유리 조각을 작업의 매체로 삼았다. 또 다른

사건은 볼티모어의 낙후된 지역에서 철거를 앞둔 건물의 유리 파편을 발견한 것이다. 작가는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가 발바닥을 다칠

것을 염려해 직접 길을 쓸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 유리를 작업에 끌어오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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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1x15cm(3), 2020

여기에 작가는 한 가지 맥락과 당위성을 담았다. 바로 ‘수행성’. 미국에서 처음 유리 조각으로 작업하기 시작했을 때 작가는 직접 그것을 쓸어 모아 씻고 구분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퍼포먼스’로 상정, 그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수행적 과정을 통해 작가는 자신을 정제하고 또 정제했다. 마치 쓸모 있는 유리 조각을 거르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가짐을 가다듬은 것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그녀의 작품이 ‘과정 미술(process art)’로 읽힐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11년

귀국하기 전까지 뉴욕 미술 신에서 주로 활동한 그녀는 어떻게 보면 기본 재료를 가지고 긴 호흡의 작업을 하는 작가였다. 뉴욕

현대미술관 PS1, 뉴욕 국립아카데미미술관, 오니시 갤러리, 러시 아츠 갤러리, 두산갤러리 뉴욕 등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뉴욕 미술계는 그녀를 추상적 작품을 선보이는 젊은 예술가로, 비록 다른 표현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추상예술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한국에 오면서 그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그 궤도를 조금 달리하기 시작했다. 작품을 구성하는 유리를 구하는 곳이 달라진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같은 유리 작업임에도 작업 과정의 중요한 퍼포먼스에서 그 힘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에서는 그녀의 작품에 깃든 과정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마지막으로 완성된 모습, 외형에 초점을 맞춰 평가했다. 주로 ‘한국적 미’와 관련이 있었는데, 백자나 청자와 같은 작품이라는 평에 대해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생각한 작업적 특성과는 완전히 다른 감상평을 받았기에 초반에는 적지 않이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도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계속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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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Letters to You, Mixed Media, 38×34.5×14.5cm
오른쪽 24×33×15.5cm

이번 노블레스 컬렉션 전시 <기억의 여행>에서도 작가는 그동안 꾸준히 보여준 어법을 차용한 신작을 선보였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 조각의 출처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귀국 후 주로 폐차장에서 사고 흔적이 남은 유리 파편을 모아 작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으로 책상 유리를 주문했는데, 배송 사고로 깨진 유리를 받았다. 조각난 유리를 어찌할까 고민하던 중 작가는 그것이 바로 작업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터넷 쇼핑이 활발해진 지금 평소보다 이러한 배송 사고가 자주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파손된 유리에는 21세기 전 세계가 겪는 전례 없는 전염병의 시대성이 담겼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성미 작가가 유리 조각으로만 작업한다고 오해하진 말 것. 전시의 중심이 되는 작품은 바로 ‘오늘의 조각’인데, 작가가 일기처럼 자신의 감정을 담아 작업한 조각물이다. 그날 그 시간 작가가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투영한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작품에 표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사람들이 그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거나 위로를 얻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든 누가,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이성미 작가의 작품은 특히 그 감상의 폭을 활짝

열어둠으로써 유연한 해석과 경험의 여지를 제공한다. 굳이 어떤 메시지를 읽으려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기에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전시장을 돌며 작가의 감성에 푹 빠져들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노블레스 잡지 5,6월호 / 아트나우(Artnow)issue 34/summ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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