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s from the Past : 과거로부터 온 흔적
맹지영 | 독립 큐레이터
<기획의 글>
이성미는 이삼십대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타국에서 겪었을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모국으로 돌아온 후 마주한 또 다른 문화적 생경함의 경험은 그의 작업 세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작업에서 그러한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가 선택한 재료와 그것을 다루는 태도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그의 내면에 자리한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에 대한 연민,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담긴 추상화가 펼쳐진다. 작가는 마치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아크릴, 자동차 유리 파편, 레진 등과 같은 재료를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탐구하고 매만져, 구체적인 형상을 벗어나 본래의 재료를 가늠하기 어려운 표면과 형상으로 내놓는다. 이는 때로 향의 그을음으로, 길바닥의 질감을 담은 사진으로, 혹은 레진이 흘러내려 만든 자국이나 수차례 긁고 문지르기를 반복한 드로잉으로 구현된다. 이번 전시《Marks from the Past : 과거로부터 온 흔적 》은 초기작 <무제 #600>(2006)를 비롯한 향 그을음 작업부터 사진을 이용한 작업, <Unfolding>연작, 그리고 초기와 근작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이성미의 추상적 이미지가 남긴 흔적의 여정이 중심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이성미의 작업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미지의 모양은 추상에 가깝다. 미국 브루클린 작업실의 창밖의 풍경이나 도로 바닥 모습을 근접 촬영한 사진 작업 또한 기록으로서의 사진이라기 보다 당시의 현장의 상황이 담긴 뿌연 수증기나 날씨가 조성하는 분위기, 그리고 그에 조응하는 작가의 심상을 닮은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중후반 향의 그을음을 반투명한 아크릴 박스에 담아낸 일련의 입체 작품과, 플라스틱 재질의 반투명 필름인 마일라(Mylar)에 그린 무채색 선의 드로잉들, 그리고 특히 사진 위에 여러 액상 재료들로 드로잉 한 작업이나 아크릴 인쇄 방식인 디아섹(Diasec)을 선택한 경우들은 마치 또 다른 겹의 피부막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재료를 다루면서도 그 물성이 결국 반투명한 표면으로 귀결되는 점은 작업이 품은 일관된 방향성을 엿보게 한다.
작가의 재료 선택은 필연적이지만, 그것이 오랜 시간 변화를 거치며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예측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성미는 그저 매 순간 질료와 작업이 던지는 질문에 오랜 시간 마주하며 답하는 과정을 거친다. 파악 불가능해 보이던 미지의 대상이 점점 자신의 내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 시간은, 한때 ‘투명했던’ 재료들이 서서히 변모해 가는 과정이며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파편으로 조각났던 유리들은 다시 응집되어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게 연마되고, 투명한 아크릴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쳐 반투명한 표면을 갖는다. 나무 패널 위에 실험을 거쳐 만든 안료가루, 연필, 각종 혼합재료를 바르고 긁고 문지르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신작 드로잉 역시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이 드로잉들은 여러 매체를 섭렵해 온 작가의 구작들과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화의 결과물로서 이성미가 빚어낸 반투명의 몸체는 외부의 예측 불가능한 영향과 개입을 자기만의 필터로 수용하려는 지난한 노력의 일환이다. 작가는 투과되고 튕겨내며, 반사하고 밀어내는 통제할 수 없는 물질의 성격을 매번 마주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통제하려는 강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삶의 매끄럽지 못한 울퉁불퉁한 질감을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게 하는 그의 작업은, 이제 지난 십여 년간 집요하게 다듬고 매만지던 태도에서 나아가 또 다른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다수의 신작 드로잉에서 초기작의 흔적이 엿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제 매끈하고 반짝이던 반투명의 표면은 평론가 구나연의 언급처럼 ‘반열림’의 문이 되어 작가 자신은 물론 관객의 시선까지 안으로 품는다. 항상 내면을 향해 있는 그의 수행적 태도는 과거의 흔적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 마주할 아름다운 흔적의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