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투명의 문
구나연 | 미술비평가
수행
우리는 작품을 볼 때 , 거기에 투영된 작가의 삶을 함께 바라본다.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철학이 작품의 전신에 깊숙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현시해야 하는 절박하고, 진실한 삶의 언어를 지니고 있으며, 세계를 경험하고 느끼는 방식이 그 언어로 발화된다. 이를 위해 그는 작업을 실현할 질료에 대한 열망을 품는다. 질료는 작가의 언어를 빚어내는 도구이며, 그의 확장된 육체이다. 이성미의 작업은 이렇게 세계에 대한 그의 사유와 질료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난한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다. 불꽃이 피어나는 향 뭉치가 타들어가며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을음은 엘뤼아르가 “불이 마치 고독의 의식처럼 빛을 발할 때, 고독하게 불가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인간”의 시간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1)
이성미의 불은 향이다. 그것은 빛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연소를 목적으로 한다. 불의 흔적이 재라면, 그을음은 연기의 흔적이다. 향의 연기는 유연한 선처럼 수직으로 피어 오르다가 대기와 섞이며 공간 속에 조용히 퍼진다. 하늘로 올라가려는 신비한 연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들의 모양을 암시하며, 의식적(ritual) 신비와 연결된다. 그러나 불꽃과 연기, 향과 그을음은 미술의 질료로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의 <Untitled #600>을 보면서, 이를 작업하던 작가의 시간을 상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떠한 불순물도 허락하지 않는 진공과 같은 공간 속에서, 한없이 타들어가는 불꽃과 함께 기화되던 말들은 작가의 움직임과 겹겹 뒤엉키며 검은 언어로 드러났을 것이다. 연무가 들어찬 시간 동안 작가의 시야는 때로 흐려졌을 것이며, 들숨은 벅차졌을지 모른다. 그러다 대기의 흐름이 검은 그을음과 함께 유유히 그 모습을 드러낼 때는 불빛과 침묵이 작가의 손에 의해 조응하며 이미지로 이행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문득, 나는 이 작가는 왜 이토록 고된 과정을 거치며 작업을 할까 묻는다. 아니, 이 질문은 틀렸다. ‘왜 이토록 고된 과정을 거쳐 형상에 도달할까?’가 적합하다.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와 대면하기 위해, 그는 불꽃과 연기 속에서 일종의 수행이자 자신만의 의식을 감행한다. 이 수행은 긴 항해와 유사하다. 항해의 시간은 길이 없는 막막한 대해의 표면에서 내내 투명한 물의 파동과 직면하고 있다. 불꽃을 잠재우는 물의 속성은, 그의 손으로 수없이 사포질하여 하얗게 변한 반투명 플렉시글라스의 거친 질감이 되어 달아나는 불의 흔적을 붙잡는다. 물처럼 투명하고 파도처럼 흰 표면이 불의 검은 흔적과 만나면서, 그의 작업에는 사라진 시간의 공간이 유연히 건축된다.
우뚝 솟은 <Untitled #600>의 내부에는 불의 기억을 간직한 연기와 검은 흔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처럼 남아 있다. 이 반투명의 모노리스(monolith) 안에는 불꽃과 향, 연기와 그을음의 관계에서 발생한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간 매개자의 손길이 간직되어 있다. 견고한 기하학적 형태는 안에 머문 시간의 외피가 되어, 이와 마주한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앞과 뒤, 옆과 위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이 때 작품으로 물화된 수행의 과거는 지금의 현존과 교차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경험의 축도를 현시한다. 반투명 입체의 안팍으로 드러난 이미지는 공간적 지평을 펼치며, 과거와 현재, 가까움과 멂의 구분이 사라진 채 연기처럼 우리와 섞인다.
덧없이 기화되는 시간의 궤적으로 깊이 남은 그의 드로잉은 조각과 회화의 경계에 선 이미지로 인지되는 독특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평면을 지지대로 삼는 입체의 구조물이며, 대기가 가득 찬 무한한 공간을 닫아 가둘 때, 한없이 열리는 거리의 감각이다. 불꽃의 필멸이 남긴 불멸의 흔적은 광대한 거리와 무한한 시간의 이중성으로 존재한다. 순간과 영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모순적인 운동은 공간으로 드러나야만 온전해진다. 이성미가 ‘시간의 온도’이자 작업 ‘과정에 대한 신뢰’(believe in the process)라고 표현한 이러한 상황은 작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우발적 요인을 내포한다. 그것은 대기 속에 잠재하고 있던 낯선 이물들의 간섭일 수도 있고, 돌연히 일어난 바람의 개입일 수도 있다. 불꽃은 이 무수한 요인을 묵묵히 기화시키며 ‘이성미의 드로잉’이라는 서사의 형태를 남긴다. 이것은 질료가 지닌 생명력에 자신을 개방할 때 가능하며,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자면, 이 형상은 “질료적 상상력의 무한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몽환적 질료가 그득한 그 이미지들”이다.2)
질료
이성미는 질료와 재료를 의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Crying for you>는 버섯 형태의 형상 위로 레진이 떨어지며 굳어 간 형상이다. 눈물과 같이 흘러내린 투명한 질료는 바닥으로 떨어져 <Painting by Sculpture(Crying for you)>를 만들어낸다. 버섯은 죽은 나무 위에서 솟아난다. 꺼진 듯 보이는 생명의 끝에서 자연은 또 다른 생명인 버섯을 새롭게 피워낸다. 죽음을 목도하며 흘리는 눈물 속에는 간절한 생에 대한 열망이 숨어 있다. 미술의 질료를 마치 누군가를 대하듯 하는 태도에는 질료를 통해 태어나는 작품과 작품을 통해 숨을 쉬는 질료사이에서 일어나는 순환적인 맞잡음이 자리한다. 따라서 “당신을 위한” 그 눈물은 바닥에 떨어져 또 다른 작품을 만들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차원의 생을 맞이한다. <Crying for you>에서 중력에 의해 흐른 레진은 <Painting by Sculpture>에서 버섯 형상의 일부와 같이 둥근 파형을 만든다. 이것은 질료의 생동이 연계하는 아름다운 생명의 이음이면서, 조각과 회화가 서로를 내포하는 양태가 된다.
자신을 불꽃으로 태워 만든 그을음의 형상도, 죽음 위에 솟아난 생명체를 타고 흘러 만들어진 조각과 회화도, 질료가 지닌 생명력에 집중할 때 발견되는 갱신의 국면을 보여준다. 예컨대 파괴되어 깨진 자동차 유리 파편을 수집하고, 이를 촘촘히 다시 붙이며 놀랍도록 견고하고 청연한 형태를 만들어낸 이성미의 수행자적 집념은 버려진 대상에 숨은 고유한 가치를 드러내려는 의도에 뿌리를 둔다. 객체화된 질료를 의인화하는 일은 그것에 투영된 작가의 정서를 반영한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아무도 원치 않는, 보잘 것 없는 이 재료에 애잔함을 느낀다. 나는 이 연약하고 보잘것 없는 것들을 기존에 주어졌던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서 보석보다도 더 빛나고 귀하게 만들고 싶었다. ...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사물을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하면서, 상처받고 나약한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치유되었던 것 같다.3)
이성미에게 질료는 작품의 부품이 되기 위해 필요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의 수명을 다한 인공적 대상으로부터 무수히 거슬러 올라간 근원적 물질로의 환원이고, 그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생명성의 발현이다. 사물이 물질로서 지닌 고유한 습성은 작가의 고된 여정을 흡수하며 교감을 형성하고 , 비로소 하나의 형상을 갖춘다. 생명체와 같이 치유된 대상이자 미적 대상으로 다시 생성된 그것은 각고의 시간을 묵직하게 머금어야만 지닐 수 있는 광택과 질감을 갖는다.
예컨대 <Unfolding> 연작은 유약을 바른 것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표면을 지니고 있다. 얼핏 도자기처럼도 보이는 이 작업의 재료는 스테인레스 철망과 레진 등이 결합된 것이다. 최초의 재료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흠집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서늘한 광택은 수없이 갈고 또 갈아낸 수행에서 비롯된다. 강박적이라 할 정도로 무결한 상태를 지향하는 집요하고 반복적인 행위는 작가의 내면이 작품의 표면과 동등해지는 어느 순간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질료에 대한 의인화가 자기의 투영을 통해 더불어 변화하는 동일체의 은유를 만들어낸다. 종이처럼 접히고 구겨진 형태는 외부의 작용에 의해 이지러지기 쉬운, 아직 펼치지 못한 육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흠결 없는 표층은 그 무엇보다 빛을 환대하여 그 빛을 발한다. 작품을 행하는 도정은 작가의 구체적인 행위와 역동을 시침으로 한 시간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작가의 인생이 작업에 소요한 무수한 시공간은 작품이라는 대상에 그대로 침잠한다. 이성미가 작품의 표면이 매끄러워질수록 자신의 삶도 그렇게 되는 듯 느꼈던 것 역시, 작품은 우리 앞의 어떤 객체이기 이전에 작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의 변화는 자연히 작가의 변화를 의미한다. <돌이 되기 위한 수행 2>은 매끄러운 표면의 광택으로부터 벗어나 울퉁불퉁한 요철을 지닌 돌의 질감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무결한 삶에 대한 욕구는 이제, 삶이 지닐 수밖에 없는 요철을 수용하되, 단단한 돌이 되어 그 무엇으로도 쉽사리 깨질 수 없는 내적 올곧음에 대한 사유로 변화한다. 그것은 돌이 될 수 없는 질료로 자연의 돌이 되고자 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능을 행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과정의 풍요는 이성미의 작업 세계가 지닌 수행의 결을 펼쳐낸다. 우리는 스스로 갈구하는 삶의 모양과, 거기에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을 반복하는 어떤 고독에 맞닥뜨린다. 이성미는 바로 그 막막함의 자리에서 어김없이, 묵묵히 작업을 행한다. 무용하고 무모해 보이는 이러한 시지프스적 시도가, 어쩌면 삶의 파수꾼과 같은 그 반복이, 그 작업의 본질적인 몸짓일 것이다.
반투명
이성미의 작업에서 반투명의 플렉시글라스 박스는 내부를 개방하면서도 밀폐되어 있다. 열면서 동시에 닫히는 것은 그의 작업이 지닌 반열림(半開)의 성격을 함축한다. 바슐라르는 ‘문’이 “‘半開’라는 한 우주 전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을 안과 밖의 경계에 선 존재로서 탐구하도록 만든다. <I wish I could reach you>는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풍경 위로 격한 내적 감정이 고요하고 한없이 쏟아져 내리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그의 시선은, “같은 것과 다른것의 영역을 분리하는 표면”이며, 이는 시인이 지닌 “예민한 표면의 지대”이다.4)
바슐라르는 “문에는 두 ‘존재’가 있으며, 문은 우리들의 내부에 두 방향의 꿈”을 일깨운다고 말한다.5) 사진 이미지로 나타난 뉴욕 허드슨 강의 먼 곳은 닿을 수 없는 사람과 닿기를 원하는 사람 사이의 두 방향의 꿈을 담고 있다. 이는 강의 풍경 이미지 위를 투명하게 덮으며 끝없이 멀게 빛나는 표면에서도 드러난다. 풍경과 시선 사이에는 투명한 각막이 드리워져 있다. 반이 열린 문과 같이, 외부의 세상과 함께 누군가를 받아들이려는 내부는 투명한 각막 사이로 끊임없이 전도된다. 그리고 한때 작가의 내면과 세상 사이에 드리웠던 이 반개(半開)의 문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연히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의 작업이 지닌 ‘반투명’의 어휘는 곧 ‘반열림’의 문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수없이 샌딩한 반투명의 박스 안에 그을음으로 각인되어 있는 과거라는 시간과 이를 현재로서 받아들이는 우리 시간의 간격과도 같다. <Burning Karma>는 반투명의 마일라 필름 위에 무수히 교차한 은색의 필선이 원형을 만든다. 반복적인 흔적이 혼돈을 만들고 그 혼돈이 정연한 원형으로 응결되는 역설은 작품의 제목처럼 ‘업화(業火)’의 이미지가 된다. 삶의 무수한 행위가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업이 되며, 그 업을 다시 태우는 일은 어쩌면 삶이라는 몸짓의 순환이자 원형일지 모른다. 반투명의 화면 위에 빛이자 색채인 은색의 궤적은 그 업의 관계들이 얽혀 만들어가는 세계의 축도가 된다. 이와 마주한 우리는, 세계를 향해 나 자신을 온전하고 투명하게 개방할 수는 없지만, 모든 존재가 반투명의 표면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빛을 투과하며 시공간의 교차를 생성하는 그의 작업은 존재의 표면에 깃든 아득한 심연의 메타포를 반투명의 문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는 이성미에게 이렇게 어렵고 고되고 수행적인 작업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의 과정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막연한 소망’을 품는다고 했다. 작업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결국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손길이 지닌 반투명의 어휘는 그의 드로잉 작업들에서도 발견된다. 이미지는 완고한 선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 스미며 색채의 지형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목도하듯, 색채의 현상과 역학은 조형적 환원을 거치며 반투명의 색채로 드러난다. 질료에서 피어난 안개처럼, 평면 위에 퍼져간 물질의 잔향은 소란한 간섭이 아닌, 끝없는 침묵으로 서로를 온전히 포용한다. 그는 “드로잉은 내 작업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드로잉이 자신의 작업에 핵심적 태도라고 단언한 것은 드로잉에 작업의 본질이 잠재한다는 뜻이다. 드로잉은 생각의 구조를 가시화하는데, 이는 공간의 구조이자 시간의 구조로 축조된다. 이 축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우연에 감응할 때, 그의 수행은 반투명의 표면으로 맞닿은 세계의 형상이 된다.
1) 폴 엘뤼아르, 「내가 지금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아서는 안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김병욱 옮김, 이학사, ebook, 2004, 11.
2)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김병욱 옮김, 이학사, 2022, 37.
3) 맹지영, 「묻어둔 마음: 이성미와의 인터뷰」, https://www.sungmileestudio.net/복제-어디에나-있는-그리고-어디에도-없는-2014 (2026년 4월 3일 접속).
4)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23, 434.
5) 같은 책,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