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미: 어디에나 있는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맹지영 | 두산갤러리 큐레이터
도시의 이른 새벽은 지난 밤 누군가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통에 정신을 온통 흔들어 댄다. 들으려고 하는 자, 그리고 보려고 하는 자에게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속삭이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밤사이 침전되었던 온갖 삶의 잡념들을 뒤섞어 놓는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 스스로 더욱 단단히 매몰되어 좀처럼 거리에 널려있는 타인의 숨은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단정 지어 버리고 각자 새로 시작될 하루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상처받은 깨진 유리 조각들, 살이 반쯤은 드러나 있는 찢어진 우산들, 사람과 동물의 분비물로 얼룩진 보도, 어제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곳곳에 버려진 사연 많은 쓰레기들. 자신의 무관심한 시선도 어느덧 그 풍경의 하나가 되고 수만 겹의 층 속에 묻힌 자신의 파편들 또한 결국 내가 다시 외면할 타인의 이야기로 변모해 간다. 그렇게 개인과 타인의 이야기는 혼재된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거리에 널려있는 난폭하고 아드레날린이 절정에 달한 기억이 담긴 버려진 유리 파편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반짝이지만 날카롭고 제멋대로이다. 같은 몸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여기저기 다른 경로를 통해 섞여버렸는지 도저히 원래의 형태를 짐작해 볼 수가 없다. 그렇게 길에서 주워 모은 파편을 가져와 길거리의 흙과 먼지를 정성스레 씻어낸다. 점점 다이아몬드와 같은 반짝임이 증폭된다. 그녀는 크기가 제각각인 이들을 퍼즐을 맞추듯 그 날카로운 조각들을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맞추기 시작한다. 맞춰질 것 같지 않았던 모난 모서리들은 어느새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빽빽하게 채워져 들어맞는다. 여전히 날이 서 있는 표면에 투명한 레진을 바른다. 한 겹, 두 겹, 세 겹...... 수십 겹을 바르고 갈았을까? 까칠했던 표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끈하게 바뀌어 간다.
#조각 하나
새벽 6시면 눈이 떠진다. 자동적으로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에 담고, 대학 때부터 내 곁에 있어준 애완견 토미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뉴욕의 아침은 삭막하다. 자연이라고는 가로수가 전부인 헐벗은 동네를 나는 토미가 이끄는 대로 걷는다. 이 시간은 온전히 토미의 시간이다. 매일 걷는 같은 동네인데도 항상 새로운 듯 여기저기 코를 킁킁대며 거리를 탐색하고 자기의 영역을 표시한다.
#조각 둘
꽤 오랜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음에도, 왠지 모를 불안감은 내 일상을 지배했고, 익숙한 환경이지만 답답함과 불편함을 떨칠 수가 없다. 새벽 산책에서 가져온 유리 조각을 꺼내서 맞추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과거의 기억들을 훔쳐보고, 그 위에 나의 기억을 덧입히고,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은 지워지고, 나의 기억은 또 다시 내일이면 지워진다. 그렇게 집착에 가까운 반복적인 행위는 일상에 지나치게 가까이 자리했던 나로부터 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면서, 잊고 있었던 ‘나’를 다시 보게 만든다. 어느덧 불안했던 마음은 저 멀리 사라져있다.
#조각 셋
토미와의 산책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며, 강박적으로 오늘의 할 일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본다. 잊어버릴 새라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대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내 일상은 시작된다.
#조각 넷
새벽 6시면 저절로 눈이 떠지던 나였지만, 이제 나의 아침은 어머니 덕에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집을 나선다. 매일 아침 토미와의 산책으로 시작되었던 뉴욕에서의 일상은 몇 년 전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달라졌다. 이제는 매일 아침을 같이 했던 토미는 사라졌고, 18여년을 혼자 지냈던 나의 일상에는 어머니가 들어왔다. 아침 산책은 자유로를 운전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예전에는 산책하면서 발견하는 누군가의 흔적으로부터 영감을 받곤 했지만, 너무나도 깨끗하게 정돈된 서울의 거리에서 난 더 이상 누군가가 정신없이 쏟아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운전을 하면서 바라보는 하늘이나 구름을 보며 ‘나’로 온전히 돌아가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조각 다섯
뉴욕에서부터 해왔던 유리조각들을 붙여서 만든 작품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뉴욕에서의 나와 한국에서의 내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국 사회에서의 나는 철저한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난 완전한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쩌면 난 이렇게 모난 유리조각처럼 어디에도 딱 맞아 떨어지지 못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조각 여섯
서울의 거리는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나는 더 이상 길거리에 버려진 유리조각을 모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자동차회사의 서비스센터에서 사고로 들어온 자동차 유리조각들을 얻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그 깨진 파편을 하나씩 하나씩 맞추고, 붙이고, 바르고, 갈고, 또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
.
.
#조각 삼백이십 둘
<잃어버렸다>(2014)
<붙이다>(2014)
<유리담요>(2014)
매끈한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뾰족하고 날카로운 날이 잔뜩 서 있다. 은은한 청자 빛을 띠고 있는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버림받고 용도가 폐기된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아니다. 표면에 반사된 누군가의 얼굴은 날카로운 내부의 그것과 함께 중첩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갈구한다. 촘촘하게 박혀있는 조각들이 가진 수백 수천 겹의 시간의 무늬는 단순한 형태 안에서 하나가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