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미: 비우기와 채우기의 역설 

- Vulnerable Yet Strong

 

                 정연심(鄭然心, 홍익대학교 교수)

Yeon Shim Chung(Associate Prof., Hongik Univ.)

   이성미의 작업실에는 유리파편으로 제작된 다양한 오브제들이 산재해있다. 파편화된 신체 작업을 했던 에바 헤세(Eva Hesse)처럼, 이성미는 연꽃 모양이나 형체를 잃어버린 우산, <Empty to Be Filled> 시리즈의 작업들을 설치해두었다. 이번에 전시되는 <유리블랭킷>을 비롯해 하루하루의 일상을 기록하듯 제작된 무제의 시리즈 작업까지, 이성미의 작업은 그야말로 수집과 기억, 회귀, 반복, 재현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여러 작품에서 부유하고 있다. 일상적 의식(ritual)을 따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형상들에는 ‘일기’처럼 보이는 작가의 이야기가 투영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지우고 또 써 내려가는 글쓰기의 반복적 행위처럼, 이성미의 작업에는 수행성(performativity)이 암시되어 있다.  

   이성미는 볼티모어에서 유학을 하면서, 어느 날 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파편을 보아다고 한다. 이 파편은 자동차 사고로 남겨진 유리흔적이었으며, 당시 이러한 파편은 유학이라는 '선택적 이산(diaspora)'의 삶을 살아가던 본인과 유사한 모습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이러한 자동차 유리파편은 평범한 유리조각이 아니라, 사고라는 폭력적 순간을 동반한, 절박한 순간성과 현재성을 담았던 재료였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아직도 이러한 유리파편들이 작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미드-커리어에 이른 작가는 오랫동안 다양한 크기의 유리를 다루느라 손바닥 가운데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박혀있다. 유리를 하나씩 붙여나가는 예술가의 행위를 통해서, 비정형의 조각들은 하나씩 숨결을 이어나가는 선을 이루고, 이를 포용하는 면이 된다. 그는 유리나 혼합매체(UV protected poly-urethane) 등과 같은 평범한 재료의 속성을 가능하면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며, 반복된 규칙성과 노동을 통해서 많은 기억들을 과정 속에 투영시킨다. 이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와 대화하고, 침묵하는 ‘과정의 의식'을 치루고 있다.  

   자동차의 통유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투명색의 유리는 비취색이나 청자색 등 다양한 뉘앙스를 띤 색채로 변해버린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형상으로 와 닿지만 작품을 향해 가까이 가는 순간, 상처받기 쉬운 유리 특유의 재질과 표면은 독특한 색상을 발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에게 이성미의 작업에서 엿보이는 마티에르는 고려청자의 표면을 연상시키고 향으로 그을어진 회화적 흔적과 비정형의 무제 작업들은 불교적 카르마를 떠올리게 한다. 초창기의 사진작업을 비롯해 소멸하는 흔적 작업은 순간적인 찰나(刹那)를 기록하려는 행위이다. 수많은 시간성을 통해 파편에서 형상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겹겹이 쌓인 시간성, 즉 '겁(劫)'의 세계처럼 영원해 보인다. 이러한 시간성은 그의 작업이 지니는 물리적 노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미의 작업들이 뉴욕의 PS1이나 드로잉센터, 뉴뮤지엄 등에서 전시했을 때 그들의 눈에는 미니멀리스트들이 몰입했던 선(Zen)의 세계나 무(無)의 침묵의 세계, 미니멀한 형태를 반복해서 쌓아올린 '하나 이후의 또 하나(one after another)'로 읽혀졌을 것이다. 반복적 수행성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를 몰입시키고 치유하는 행위에 이른다. 작업실 문을 나서는데 작가는 “한국에 오니 이런 작업이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리를 사용하는 작업은 이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작업실의 모든 것이 ‘글쓰기’의 행위로 작동한다. 파편 속에 갇혀있는 글들은 작가의 독백이 기록된, 채워지고 비워진 모래 위의 글쓰기 작업으로 와 닿는다: vulnerable yet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