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뒤 남은 유리 파편, 조각이 되다
가나아트 한남, 조각가 이성미 개인전 ‘워킹 인투 어 메모리’
이성미 작가.(사진=가나아트)
가나아트 한남은 자동차 유리의 파편을 소재로 작업하는 조각가 이성미의 개인전을 3월 31일까지 연다. 메릴랜드 컬리지 오브 아트 인스티튜트 조각과를 졸업한 그는 현재 홍익대학교 조각과의 조교수로 재임 중이며, P.S.1 현대미술센터, 경기도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유수 미술관의 그룹전에 초대된 바 있다.
가나아트 한남의 천장에 설치된 조각으로 인해 전시장 전체가 푸른빛으로 일렁인다. 작가의 조각은 외견 유리를 재소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작은 유리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만든 지극히 수공예적인 과정의 소산이다. 오랜 시간과 체력적·정신적 몰두로 완성된 그의 2017년부터의 신작이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다.
이성미, ‘메모리 가든(Memory Garden)’. 혼합 미디어, 150 x 150 x 105cm. 2017.(사진=가나아트)
작가의 조각은 교통사고가 일어난 장소에 남겨진 유리 파편으로 구성됐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는 미국에 살던 당시 그가 느꼈던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버려진 존재라는 쓸쓸함이 투영된 재료다. 과거 작가는 뉴욕의 거리를 걸으며 부서진 유리를 주워 모은 뒤 이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데에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작은 파편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이 과정은 곧 작가 자신을 그러모아 다독이는 치유의 순간이기도 했을 터. 작가는 이 치유의 순간을 전시를 찾아온 이들과 나눈다.
작가는 본 전시의 제목을 ‘워킹 인투 어 메모리(Walking into a Memory)’로 명명하고 천장, 벽, 바닥에 조각 작품을 설치해 전시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작가는 산책하듯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간 구성에 공을 들였는데, 이는 관람객이 기억을 더듬듯 전시장을 거닐며 작품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이 잊고 싶은, 또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유리 조각들을 붙였듯, 전시장에 들어선 이들이 작품을 매개로 각자의 기억을 반추하고 그를 선별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유도한다.
이성미, ‘위스퍼링 유어 메모리(Whispering Your Memory) #1129’. 혼합 미디어, 30(d) x 10.5cm. 2019.(사진=가나아트)
작품의 제목 또한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메모리 캐처(Memory Catcher)’(2019)는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을 꾸게 해준다는 의미가 담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토속 장신구인 드림캐처의 이름에서 따 왔다. 작품 가운데의 둥근 구멍은 고리 모양의 드림캐처를 연상시키며, 이에는 나쁜 기억을 버리고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전시장을 나서기를 바라는 작가의 희망이 담겼다. 그 외에도 ‘메모리 퓨리피케이션(Memory Purification)’(2018), ‘메모리 가든(Memory Garden)’(2017) 등 직접적으로 기억을 지시하는 이름의 작품들이 설치된 가나아트 한남의 전시장은 거대한 기억 저장소가 된다.
전시에 출품된 ‘위스퍼링 유어 메모리(Whispering Your Memory)’ 시리즈들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작가는 당신, 즉 관람자의 기억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관람자의 참여는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 된다.
이성미, ‘메모리 퓨리피케이션(Memory Purification)’. 혼합 미디어, 90 x 90 x 60cm. 2018.(사진=가나아트)
가나아트 측은 “과거 그의 조각이 작가 개인의 상처와 기억을 주제로 했다면 이번 신작은 그 의미를 확장해 관람자와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한 다수의 기억과 치유를 주제로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전시장을 연극 무대처럼 연출하고, 관람자들이 전시장으로 들어와 각자의 기억 속을 거닐기를 요청한다”며 “전시를 찾은 모든 이들이 속삭이듯 기억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를 얻고, 전시장을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금영. “교통사고 뒤 남은 유리 파편, 조각이 되다” 「CNB JOURNAL」, 2019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