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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the Storm

 

맹지영 (미술평론, 큐레이터)

예술가에게 삶을 낯설게 볼 수 있다는 것, 관객에게 그 낯선 지점을 선사해 잊고 있었던 감성이나 기억을 불러 일으키거나 또 다른 사유를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매일 오가는 길 모퉁이를 돌면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무, 주차장 옆 이가 빠진 보도블럭 틈새에 삐죽이 고개를 내민 이름모를 꽃과 같은 일상의 소재는 지나치기 쉬운 풍경이다. 그래서 여기에 작가의 특별한 시각을 부여하여 관객의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 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성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훈련 받아 왔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10대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20여년간을 타국에서 홀로 지내다 2011년에서야 다시 모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타국에서 작가가 느꼈을 고독, 우울함 혹은 그리움, 그리고 다시 돌아온 모국이지만 또 다른 이질감과 외로움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창조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일상에서 어떻게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작품에 담아냈을까? 그녀의 작품활동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볼티모어와 뉴욕에서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용도가 상실된 것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유독 버려진 우산들이 많은 뉴욕의 길거리에는 비바람이 지나간 후 살이 구부러져 보기 싫게 튀어나와 있거나, 형태가 찌그러지고 찢겨져 바닥에 버려진 우산들이 자주 발견된다. 사실 부실하기 그지없는 그런 일회용 우산들로는 가볍게 내리는 비 정도나 겨우 막을 수 있기에, 강한 바람을 동반하는 뉴욕의 폭우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개인 후,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는 우산의 주검들은 비온 뒤 뉴욕의 일상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성미는 뉴욕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쓸쓸한 이들의 모습에 감정의 동요가 일어 났는지도 모른다. 문득 울컥 치밀어오르는 알 수 없는 서러움에 그렇게 시선이 머물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는 늘 주변의 버려지고 주목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애틋함을 가지고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부여하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이성미의 작품은 감정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슬프면 슬프다 하고 외로우면 외롭다 한다. 표현방법 역시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이다. 다만 그런 인간의 감정들이 특정한 형체로 규정지을 수 없기에 직설에 가까운 솔직함과 직접성이 작품을 더욱 추상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서 삶의 리얼리즘에 더 근접하여 보여준다. One Rainy Day (2009-2012)에서 사용한 소재인 우산의 경우도 그렇지만, The Last Gaze (2010)에서 부서진 자동차 유리조각들을 재활용해 만들어진 작품들은 이성미의 삶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부서진 파편들을 줍고 모아서 작업실로 데려온다. 이는 단순히 재료적 실험을 위해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손을 다칠 수도 있는 날카롭고 위험한 버려진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데려온 물건들을 레진으로 수십 수백겹을 입히고 갈아내거나, Evanescence 연작과 같이 투명한 플랙시 글라스에 향의 그을음으로 담아내는 반복적이면서 지루한 작업 끝에 비로소 본래의 형태를 넘어 선 낯설고 특별한 결정체를 만들어 낸다.

이성미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힘든 재료–레진, 향의 연기 등–로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 감정 등 순간적이고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는데 사력을 다한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담아 두고 잡아 두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인 동시에 어쩌면 이미 실패가 예견된 비생산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전시장 공간에 설치된 One Rainy Day (2009-2012)의 우산들과 같은 작품은 이 역설을 넘나들며 모순과 희망을 동시에 내포한다. 마치 얼음과 같은 투명한 물질로 바뀐 우산들은 버려졌던 그 순간으로 다시 시간을 되돌려 놓으려 하는 듯 찌그러지고 부실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연약해 보이지만, 각각 고유의 미묘한 색을 머금고 관객에게 우산 밑으로 들어와 비바람을 피하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들에게는 한때 버려졌었던 운명의 비애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고 마치 다시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려는 것처럼 견고해 보이기만 하다. 투명한 레진의 무수한 중첩으로 창백하기까지 한 투명함과 반투명의 중간쯤 되는 모호하고 특정한 색으로 지정되기를 거부하는 재료의 선택은 그 인위적인 물성을 통한 작가의 감정적 중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슬픔이나 외로움의 감정을 곱씹으며 감상에 젖는 것에 그친다면 그저 신파이지만, 이성미는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담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섬세하고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작업과정을 통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래서 드로잉이나 조형 작품의 전반의 명상적이기도 하면서 지극히 편집증적으로 보이는 반복적 행위의 과정은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는 선인들이 궁도나 검도 등으로 의식 수련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과 흡사하다. 행위와 대상이 분리가 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이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마음대로 조절이 불가한 재료적 특성을 가지고 길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견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매끄럽고 잘 다듬어진 단정한 표면의 작품들은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역동적인 감정의 진창으로부터 거리감을 획득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관객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감동을 강요하지도, 슬픔이나 그리움 혹은 기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 폭풍과도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와의 싸움을 작품의 과정 속에서 녹여내고 비워낸다. 매끈한 표면 이면에 배어있는 드러나지 않는 작가의 땀과 자기수행은 그렇게 깊은 수면 아래에 잠재해 있다.

슬픔과 외로움에 대한 자각, 그것의 근원에 대한 철저한 물음과 자기 이해를 통해 만들어진 이성미의 작품은 그래서 한 개인의 삶의 희노애락을 넘어 타자의 삶 속에 공명할 수 있는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이기에, 그렇게 자신과의 사투를 격렬히 벌였기 때문에 단순한 감정 전달 이상의 힘을 갖으며 오히려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또한 자신의 내면 속 고통이나 아픔 등을 외면하거나 관조적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을 통해 그 원천을 찾으려 온 몸을 던졌기 때문에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얽히고 다친 감정들도 자연스럽게 치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작품이 자기치유나 성찰의 현재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미래를 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미래가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작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폭풍우 뒤에 또 다른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미는 언제나처럼 처절하게 그 고통의 과정을 겪을 것이며 그 안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고 어디론가를 향해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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